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최명창(1466~1536)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본관 개성(開城), 자 여신(汝愼),오 송석(松石), 송음(松陰).1489년 진사를 거쳐 1504년(연산군 10) 식년문과(식년문과)에 급제,정언(正言), 헌납(獻納), 응교(應敎)등을 지내고 1519년 예조참판을 거쳐 황해도관찰사, 원주목사(원주목사) 등을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다.
중종 때 청백리(淸白吏)에 녹선(錄選)되었다. 그가 성천부사로 있을때 임금이 불러 “최모는 시종(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직책)에 합처(合處)함이니 어찌 외직에 있을 수 있겠는가.”라고 하여 곧바로 응교에 배수하였고, 대간에서 소신껏 말을 하여 회피하는 것이 없었으며 국가에서도 그의 건의를 많이 채택하였다.
최명창 묘역은 1537년(중종32)에 조성되어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왔다. 최명창은 맡은바 소임을 충실히 하고 청백리에 녹선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. 또한 묘표에 나타난 해와 달의 조각, 동자석의 형태 및 동자석에 나타난 모습은 모제적, 민속적, 미술사적 자료의 가치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판단된다.
중종 때 청백리(淸白吏)에 녹선(錄選)되었다. 그가 성천부사로 있을때 임금이 불러 “최모는 시종(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직책)에 합처(合處)함이니 어찌 외직에 있을 수 있겠는가.”라고 하여 곧바로 응교에 배수하였고, 대간에서 소신껏 말을 하여 회피하는 것이 없었으며 국가에서도 그의 건의를 많이 채택하였다.
최명창 묘역은 1537년(중종32)에 조성되어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왔다. 최명창은 맡은바 소임을 충실히 하고 청백리에 녹선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. 또한 묘표에 나타난 해와 달의 조각, 동자석의 형태 및 동자석에 나타난 모습은 모제적, 민속적, 미술사적 자료의 가치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판단된다.
이용안내
입장료: 없음
주차시설: 없음
장애인 시설: 없음
기타 관광정보 및 외국어 안내 서비스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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