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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가 활을 쏘던 장소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이다. ‘어사대비’란 ‘임금이 활을 쏘던 장소에 세운 비석’이라는 의미이다. 1792년(정조 16) 정조는 광릉(光陵; 세조의 왕릉)에 행차하던 길에 양주(楊州) 관아(官衙)가 있던 유양리(維楊里)에서 3일간 머물렀다. 이때 백성을 위로하고 민정을 살폈으며 근교의 사대(射臺)에서 신하들과 함께 활을 쏜 뒤 잔치를 베풀었다.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양주목사(楊州牧使)가 같은 해에 어사대비를 세운 것이다.
거북이 모습의 받침돌에 위가 둥근 비신(碑身; 글씨를 새기는 부분)을 세웠다. 앞면에는 큰 글씨로 ‘어사대’라고 썼다. 뒷면의 비문에는 ‘정조가 활을 쏜 사실과 더불어 친히 지은 시와 환궁 후 내린 말씀을 관아의 오른쪽 벽에 걸어 두었다고 하면서 이러한 내용을 읍지(邑誌)에도 기록한다’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. 양주목사 이민채(李敏采)가 직접 비문을 짓고 글씨도 썼다. 한국 전쟁 때 생긴 총탄 자국으로 인해 현재 비신 앞면의 일부가 훼손된 상태이다.
거북이 모습의 받침돌에 위가 둥근 비신(碑身; 글씨를 새기는 부분)을 세웠다. 앞면에는 큰 글씨로 ‘어사대’라고 썼다. 뒷면의 비문에는 ‘정조가 활을 쏜 사실과 더불어 친히 지은 시와 환궁 후 내린 말씀을 관아의 오른쪽 벽에 걸어 두었다고 하면서 이러한 내용을 읍지(邑誌)에도 기록한다’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. 양주목사 이민채(李敏采)가 직접 비문을 짓고 글씨도 썼다. 한국 전쟁 때 생긴 총탄 자국으로 인해 현재 비신 앞면의 일부가 훼손된 상태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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주차시설: 없음
장애인 시설: 없음
기타 관광정보 및 외국어 안내 서비스: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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